문서의 이전 판입니다!
SSL 레코딩 콘솔의 의미
1970년대 초, dBx의 창립자 데이비드 블랙머(David E. Blackmer)는 프로 오디오 업계에 큰 변화를 불러온 인물이다. 그는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밀 VCA(Voltage Controlled Amplifier, 전압 제어 증폭기) 회로, 바로 ‘Blackmer gain cell’을 개발했다. 이 회로는 이전 VCA에 비해 훨씬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와 낮은 왜곡, 그리고 정밀한 제어 능력을 제공했다. 이후 이 기술은 dbx202 같은 하이브리드 칩과 다양한 집적회로(IC)로 발전하며, 콘솔, 컴프레서, 노이즈 리덕션 등 프로 오디오 장비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Blackmer VCA의 등장은 레코딩 콘솔 설계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기존 아날로그 콘솔은 페이더나 노브를 움직이면 오디오 신호가 직접 그 부품을 통과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VCA를 활용하면, 사용자의 손이 닿는 페이더나 노브는 오디오 신호 대신 제어 전압만을 다루게 된다. 실제 오디오 신호는 VCA를 통과하면서, 이 제어 전압에 따라 증폭도가 조절된다. 덕분에 신호 경로와 조작부가 완전히 분리되고, 콘솔의 모든 설정(페이더 위치, 노브 값 등)을 전자적으로 저장하고 불러오는 리콜(Recall) 기능이 가능해졌다.
이런 설계의 대표주자가 바로 SSL 4000 시리즈 콘솔이다. SSL 4000은 모든 페이더와 노브에 VCA 기반 제어를 적용해, 신호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리콜과 자동화 기능을 제공했다. 믹스 세팅을 저장해두고 언제든지 그대로 불러올 수 있으니, 믹스 수정이나 세션 관리가 훨씬 자유로워졌다. 믹싱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물론 이런 구조에는 단점도 있었다. 고정밀 VCA 회로와 복잡한 제어 시스템, 메모리 저장장치 등으로 인해 콘솔의 제작비가 크게 올라갔다. 게다가 SSL 콘솔의 마이크 프리앰프는 동시대의 NEVE나 API 등 고급 콘솔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다고 평가받지는 못했다. NEVE의 프리앰프가 제공하는 따뜻함과 음악적 깊이, 존재감에 비해, SSL의 프리앰프는 깔끔하고 무난하지만 특별한 개성이나 풍부함에서는 다소 평범하다는 평이 많았다. 실제로 SSL 콘솔의 음질 자체가 동시대 최고급 콘솔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믹스 리콜과 자동화가 가져온 작업 효율의 혁신은 이런 음질적 논쟁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엔지니어들은 SSL 콘솔에서 자유롭게 세션을 저장하고, 언제든지 불러와 수정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창의적이고 유연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SSL 콘솔은 마이크 프리앰프의 퀄리티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이유로, 고품질 레코딩을 중시하는 스튜디오에서 메인 콘솔로 선택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NEVE나 API 등, 보다 풍부하고 음악적인 프리앰프를 가진 콘솔들이 레코딩 현장에서는 더 선호되었다. 하지만 믹싱을 주요 작업으로 삼는 스튜디오에서는 SSL 콘솔이 사실상 필수 장비로 자리 잡았다. 믹스 리콜, 자동화, 효율적인 신호 흐름 등 믹싱에 최적화된 기능 덕분에, SSL 콘솔은 전 세계 믹싱 스튜디오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SSL 4000 시리즈는 ‘녹음용 콘솔’이 아니라 ‘믹싱의 도구’로서, 현대 음반 산업의 작업 방식과 창의성을 크게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DAW(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 소프트웨어가 표준이 되면서, 저장과 불러오기, 리콜 기능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기본 기능이 되었다. 과거에는 대형 콘솔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믹스 리콜의 혁신이, 이제는 노트북 한 대와 소프트웨어만으로도 가능해진 셈이다. 이렇게 기술은 계속 발전하며, 음악 작업의 자유와 창의성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Recall 없는 SSL Origin 콘솔, 영혼 없는 SSL
[공지]회원 가입 방법
[공지]글 작성 및 수정 방법